푸른테곤봉멍게 (리온)
"Wish I could read your mind ... I wanna start tonight, no no no more lies" - Secrets
세상에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으시나요?
대뜸 이런 말을 꺼내는 사람이라면 지금 굉장히 심심한 사람이거나, 사후세계에 대해 좋은 말씀 전해주겠다는 사이비거나, 오컬트 문화에 흥미가 다분한 오타쿠일지도 모른다. 그 질문에 예스 또는 노 답변을 내놓는 사람이라면 엠비티아이가 N이냐 S이냐를 추측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가볍게 던진 주제에 바짝 굳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귀신에게 잘못 걸린 채형원일 것이다.
처음엔 꿈을 꾼 건 줄로만 알았다. 잠결에 침대가 달달 떨리는 게 느껴져서 실눈을 떴는데 거기에 귀신이 있었다. 요새 귀신은 다리도 떠나? 그런 생각이나 쪼끔 하다가 가위 눌렸겠거니 하고 다시 잤다. 얼큰하게 취해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계속 틀리고 있을 때는 안에서 문이 열렸다. 그걸 술이 다 깨고 나서야 눈치챘는데 그냥 무시했다. 에이 설마... 귀신치고 너무 친절했다. 게다가 이십삼년 동안 귀신을 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그러나 계속 모른 척 하기엔 채형원은 지금 졸리거나 취하지도 않은 백퍼센트 멀쩡한 정신이고, 눈 앞엔 꽤나 멀쩡하게 생긴 귀신이 서있다. 귀신이라면 피도 조금 흘리고.. 머리도 조금 산발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이쯤 되니 멀쩡한 쪽이 제 쪽인지 귀신 쪽인지도 가늠이 안 됐다. 아 씨발. 방금 눈 마주친듯.
형원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서 딴청을 피웠다.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온 신경이 허옇고 길쭉한 반투명 형체에게 다 쏠린 채로 몸이 바짝 굳었다. (쫀 건 아니다. 귀신 잡는 백골부대 출신인데.) 휴대폰 찾아서 신나는 노래라도 크게 틀어두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재생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귀신이 답지 않게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여기 내 집인데.”
그 말이 언령이라도 된 것 마냥, 손가락 까딱 할 수가 없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형원은 이 상황이 짜증날 정도로 익숙하다. 그야 서양풍 호러 영화 도입부는 항상 이렇게 시작했으니까... 수상할 정도로 상태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 집에 이사온 가족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서 마주친 귀신은 내 집에서 나가!!!를 외치는 게 국룰도 아니고 지구촌룰인 법이다. 그런 주인공을 보고 있으면 왜 가지 말라는 곳에 굳이굳이 기어들어가냐고 분통을 터뜨렸는데 그게 내 집이었던 거예요. 눈물이 났죠. 어쩐지 서울 한복판 1.5룸이 너무 값싸게 나왔다 싶었다. #@즉/시/입/주@# 써있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이승탈출 프로젝트
w.파란테곤봉멍게
귀신과의 기이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 귀신이 말 걸었을 때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곧장 집밖으로 뛰쳐나와 직방 다방 피터팬의 어쩌구를 죄다 뒤져봤지만 역시 이만한 매물이 없었기에 다시 얌전히 집으로 돌아갔다. 갓 전역한 스물세살 복학생에게 계약 파기 위약금을 물 정도의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신세 좀 지겠다고 빌붙을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간병기는 못 됐지만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의 피가 아직 흐르고 있다고(정말?) 생각했고. 귀신보다 내일 아침 1교시가 더 무섭고, 서울의 미쳐버린 월세가 더 무섭고... 뭐 그랬다.
무엇보다 그 귀신이 해코지 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았다.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귀신은 “여기 내 집이야...” 몇 번 말하긴 했는데, 끝까지 안 들리는 척 하고 있으니까 더이상 말을 걸진 않았다. 이상하게 나가라는 말도 안했고. 그런데도 귀신은 혼자 바쁘고 혼자 시끄러웠다. 아주 많이.
“넌 이름이 뭐야?”
“진짜 예쁘게 생겼다.”
“내 집에 자꾸 누가 들어와서 짜증났는데.”
“이번엔 뭐, 같이 살아도 괜찮을지도.”
이사 온 초반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점점 대범하게 다가와서 형원을 부산스럽게 훑어보곤 짧은 감상평이나 남긴다. 귀신이 뭐 이래? 인간에게 호의적인 귀신은 듣도보도 못했다. 그것도 그냥 호의적인 수준이 아니고...
“너 볼살 진짜 많다.”
그러면 닿지도 않는 손가락으로 형원의 볼 근처를 꾹꾹 찔렀다. 하얗고 기다란 게 둥그런 얼굴을 살짝 통과했다가 빠져나오고 다시 쑥 들어갔다가 나오고. 분명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니까 갑자기 간지러운 것 같아서 얼굴을 벅벅 긁었다. 그러면 귀신은 꺄르륵 웃었다. 필사적으로 그 쪽을 안 쳐다보는 중이라 얼핏 보인 건데도 해맑은 앞니가 가지런했다.
형원의 반응이 꽤나 웃기고 재미있었는지, 이제 귀신은 아주 대놓고 형원이 움직이는 경로 앞에 불쑥 서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는 길목에, 주방에서 물 마시고 현관으로 향하는 좁은 통로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서 형원이 자신을 통과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미친. 멈칫 하는 순간 바로 들키는 거다......
의식하는 순간부터 발걸음이 어색해진다. 내가 계속 이 박자로 걷고 있던 게 맞나? 귀신을 통과하기 직전에 숨을 헙 들이키고 꾹 참았다. 숨참고 귀신다이브.. 그 짓도 몇 번 하다보니 적응됐다. 쪼금 추워진 것 같기두 하고. 몸을 잘게 떨면 뒤에서 또 히히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호의적인 수준이 아니고, 뭐랄까, 관심있는 애를 괴롭히는 초딩 같달까? 갈수록 사람 신경을 아주 살살 긁는 게...
*
“기분 탓이 아니고 진짜로 나 자는데 계속 쳐다본다니깐?”
“걍 스트레스 탓이겠지. 뭔 귀신이여.”
휴일엔 하루종일 침대에서 뒹굴다가 해가 다 질 때 일어나는 게 루틴이던 채형원이 웬일로 점심을 사겠다며 연락을 해오자 유기현이 냉큼 뛰쳐나와 삽겹살을 짭짭 씹으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쳐다보는 거 말고 딱히 뭐 나쁜 건 없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버티고 있던 거긴 한데...”
“그냥 계약 기간만 버텨봐. 이 동네에서 월세 삼십에 좀 정신사나운 룸메 정도면 땡큐지.”
룸메..? 이걸 룸메라 할 수 있나? 그보다는 무단침입에 가까운... 아니, 그러니까 확실히 영화에서 보던 것 같은 나쁜 짓은 없긴 했는데. 채형원은 또다시 호러 영화의 창의력 부족에 개탄하고 만다. 세상엔 유치하고 어수선한 귀신도 있던 거였는데 허구헌 날 계단에서 밀치거나 옷장에서 기어나오는 스토리만 짜고 있으니.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의 귀신 등장에 졸지에 사람을 말려죽일 수 있는 101가지 방법에 대해 영화관도 아니고 실전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아니 그래도 진짜 신경쓰여서 미칠 것 같애. 이렇게 전 세입자들도 다 기빨려서 방 뺀 거 아니야?”
벌건 대낮부터 소주를 콸콸 붓고 있는 채형원이 조금 안쓰러웠는지 유기현이 자세를 고쳐 앉고 성의껏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종일 쳐다보면서 혼자 막 뭐라뭐라 말해.”
“뭐라고? 막 나가라고 해?”
“아니 그건 아닌데.”
“엉?”
“막... 나보고 이쁘다고 해.”
“... 뭐?”
“그리고 자꾸 만져.'”
“귀신이 만져지는 거였어..?”
“아니 그니까 나를 통과해서 막 만져...”
“너 그거... 색귀... 뭐 그런 거 아니냐?”
근데 그렇다고 음탕?한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채형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유기현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거봐. 그냥 너가 미친 거라니까. 아무리 귀신이 눈이 삐었대도 무슨 너가 이쁘다고 해;;’ 하면서 앞접시에 고기를 잔뜩 덜어준다. 입술 삐죽 내놓고 ‘야이 니는 친구가 힘들다는데.’ 툴툴대던 채형원은 또다시 멀쩡한 쪽이 저인지 유기현인지 모르겠는 기분이 든다.
*
“형원아.”
귀신이 내 이름이 채형원이란 걸 알아버렸다.
일전에 엄마랑 통화하던 내용을 들었던 게 틀림없다. 이 망할 집구석에 사생활이라곤 하나도 없고. 틈만 나면 형원아! 불러대는데 관성적으로 제 이름이 불리기에 고개가 돌아가는 거 참아보겠다고 하루종일 초긴장 상태에 놓였다. 목소리는 왜 또 쓸데없이 발랄하고 지랄이신지.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몇 살이지? 왜 대뜸 반말이세요. 슬슬 보수꼰대 자아도 깨어났다.
귀신은 특히 형원이 나갈 준비를 할 때마다 정신없이 왔다갔다 했다. 거울을 보고 옷장을 뒤적일 때 불쑥 튀어나와 그거 말고 이거 입어, 모자는 별로야, 말을 얹었다. 이런 애라면 빈 집에서 확실히 심심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가는 걸 자꾸 방해하려는 건가. 아니면 그냥 형원이 하는 모든 것에 딴지를 걸고 싶은 걸수도… 그러면 형원은 굳이굳이 귀신이 짚어주는 옷과 정반대의 옷을 골라 입었다. 괜한 오기를 부리다보면 기상천외한 믹스매치가 탄생한다.
형워나 지금 패션 진짜 거지같음.
진심 그러고 나간다고?
왜 옷을 얼굴빨로 입으세요;; why? ;;
그러는 지는 귀신이라 맨날 똑같은 후드티만 입고 있는 주제에. 내심 민혁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형원은 따질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꾹 눌러 삼켜낸다. 이상한 귀신때문에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놈이랑 붙어있으니 없던 성질머리 박박 긁어와서 맞지랄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지만... 참자.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은 아니고 귀신이지만) 아무튼 면하고...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데 저렇게까지 끊임없이 말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그것도 채형원 기분 잡치게 하는 말만 골라서.
내가 저 얼굴이었으면 낮이고 밤이고 남자고 여자고 다 후리고 다녔겠다.
xx를 xx해서 xx xxx해버려도 모자랄 판에...
귀신에게 제정신을 바라는 것도 웃기지만 진짜 미친놈이 아닌가 싶었다. 참아야.. 하나..? 그렇다고 안 참아봤자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최대한 누르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멀뚱히 서있는 귀신을 통과해 지나쳐서 빨리 나가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절묘하게 겹쳐지는 순간 이 미친 귀신이,
쪽.
“으악!!!”
끝내 못 참아버렸다.
쪽 소리를 낸 것이다. 쪽? 쪼옥..???? 물리적으로 닿지 않은 거 알겠는데 이것도 추행? 희롱? 뭐 그런 거 아닌가? 허공에 닿은 입술을 박박 문지르며 질겁을 하는 형원을 두고 그 애는 앞에 태연하게 서있다.
역시 너 나 보일 줄 알았어.
왜 모르는 척 해? 나는 너 맘에 드는데.
알긴 뭘 알아. 형원의 입에서 기가 찬 숨이 흩어진다. 황당한 행동과 뻔뻔한 태도. 그에 상반되는 순진무구하고 개구진 표정. 아,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건 처음이다. 맑고 투명한 얼굴이 눈에 띄게 앳되다.
*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ㄴ 집에 귀신
ㄴ 무당 굿 얼마
ㄴ 창신동 원룸 매물
ㄴ 월세 계약 파기
Q. 자꾸 달라붙는 귀신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무당이 굿하면 천만원 넘게 든다는데 원래 다 그런가요? 내공 백 드려요..
A. [태양신] 굿은 귀신들의 잔치인 걸 아시는지요? 이런 것들을 하면 귀신들에게 절을 하고 비는 꼴이 되어 귀신의 종이 되는 겁니다. 무당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사기 당하지 마십시오! 심리상담이나 정신건강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어쩌고저쩌고...
굉장히 좋은 집이 저렴한 가격에 나와서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귀신 나오는 집인 줄 모르고 월세 계약을 했는데 아직1년반이나 남았습니다. 자꾸 전자기기가 오작동하고 남자 목소리가 들려서 너무 무서운데 이런 경우 집주인이 계약 파기를 해주나요? 법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집을 뺄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ㄴ 세상에 귀신은 없습니다. 전자기기의 오작동은 근처 송전탑에서 강한 전자파가 나온다면 그 영향일 수 있고 어쩌고저쩌고
ㄴ 정확한 근거가 없어 법적으로 힘들겁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제보하고 유튜브 올려서 돈 버신 다음에 다른 집 하나 장만하세요.
형원은 눈을 뜨자마자 초록창을 들락이다가 페이스북을 켠다. 친구 검색하기. 이민혁. 지금 소금 뿌려놓은 침대 근처에서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뚱히 서있는 저 귀신의 이름이랬다. 검색결과 26,483명. 시간이 날 때마다 차례대로 프로필을 눌러보지만 아직 저 얼굴은 찾지 못했다. 그냥 계정을 물어보면 될 일인데 괜히 뒷조사하는 것 같아서. 몰래 찾아보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고 화면을 껐다.
“아까 너 자는 동안 택배 왔던뎅.”
슬쩍 현관 밖에 나가봤는데 택배기사님 수염이 엄청 많더라. 그러면 밥 먹을 때 안 거슬리나?
매끈한 턱을 쓸며 태연하게 쓰잘데기 없는 말을 붙이는 꼴을 보니 어제 일이 꿈은 아니었구나 싶다. 허공 입술 박치기 사건 이후로 채형원은 욕을 했다. 욕을 하는 형원을 두고 이민혁은 새침한 말투로 네가 이 집에 사는 걸 허락하마 답했다. 월세도 안 내는 게 집주인 행세를 하기에 어이가 없어진 형원이 따지자 민혁은 내 덕에 집값이 떨어져서 싸게 들어왔으니 감사하라고 했다. 할 말이 없어진 형원은 소금을 집어 던졌고 항상 할 말이 많은 민혁은 소금 뿌리지 말라며 질색했다. 바닥에 흩어진 소금을 치워야 하는 것도 형원의 몫이었기에 둘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일어났으면 빨랑 밥먹구 학교 갈 준비해.”
“아침 안 먹어...”
막상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 이민혁은 (조금 귀찮다는 거 빼고는) 같이 지낼만 했다.
형원이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으면, 야 너 그러다 수업 늦어!! 외치면서 1분이 지날 때마다 34분, 35분, 36분... 친절하게 알람 역할을 해줬다. 그 덕에 채형원은 지각할 일이 없었다. 야 너 잊지 말고 월세 내라. 오늘이 월세날인 거 세입자도 까먹고 있었는데 지박령이 알려준다. 리모콘 찾느라 바닥을 더듬거리고 있으면, 저기 방석 아래. 슬그머니 가리켰다. 어떻게 다 아는 거지? 신기해서 몇 번은 휴대폰 좀 찾아달라고 대놓고 부탁했다. 시리야- 부를 일 없이 바로 나왔다. 약간 뭐랄까, 귀신이란 거 생각보다 편리할지도..?
물론 가끔은 악령 들린 것처럼, 아니, 악령처럼 굴기도 했다. 술 마시다 막차가 끊긴 비운의 통학생을 위해 채형원이 거실 바닥을 내줬더니, 그새를 못참고 겁을 줘 쫓아내버렸다. 가위에 눌렸는데 너무 무섭다며 허둥지둥 나가는 영태를 보면서 형원은 괜한 부채감에 야간할증 택시비를 송금해줘야 했다. 뭘 잘했다고 씩씩대는 이민혁을 꼬라보다가 목소리가 커진다. 내 집에 아무나 들이지 마. 여기 내 집이기도 하거든? 아무튼 허락은 받고 들여야 할 거 아냐. 아니 너 허락을 내가 왜 받아야 하는데. 귀신과 싸우면 이게 문제였다. 유치한 말싸움밖에 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열받아도 멱살을 잡거나 주먹다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형원은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계속해봤자 상처만 남는다고 생각해서 문을 쾅 닫고 시간을 갖는 사람이었고, 민혁은 지금 문제는 지금 해결하자며 스르륵 벽을 통과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귀신이었다. 아 지겨워 진짜. 그래도 마무리는 항상 화해하고 끝냈다. 채형원은 본인이 참아준다고 생각했다. 이민혁은 본인이 봐준다고 생각했고. 서로가 진짜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정말 어쩔 수 없나..? 어쩔 수 없는 거 치고 둘은 서로에게 착실하게 적응해갔다. 민혁은 티비를 보고 싶을 때마다 형원을 불러 113번 좀 틀어달라고 했다. 곧 드라마 시작한단 말야 빨리빨리!! 그러면 형원은 자다 깬 둥근 얼굴로 느적느적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귀찮은 척 하면서도 민혁이 볼륨 좀 높여달라고 할까봐 다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리모콘을 쥐고 있다는 걸 안다. 헐. 전개 미쳤다. 흥미롭게 감상하던 민혁이 옆을 보면 형원은 잔뜩 과몰입한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우는 거 아니지? 형원은 손을 휘휘 내젓고, 다음 날 민혁이 깨우지 않아도 알아서 시간 맞춰 티비를 켰다.
시험기간에는 형원이 죽을 상을 하고 책상에 앉아 고통스러워 했다. 아씨 이거 뭐더라. 형원이 중얼거리며 머리를 뜯을 때마다 민혁은 옆에서 살살 달랬다. 공부 안 해도 되는 귀신이 개꿀인듯. 귀신만 할 수 있는 저세상농담을 던지니 형원도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힘없어서 조금 측은하기도 했다. 으이구 짠한 거. 나도 시험장 가서 다른 애들 꺼 컨닝해서 몰래 알려줄까? 이번 시험 통논술이야... 그러면 민혁은 조용히 옆에 앉아 같이 밤이나 새워줬다.
형원이 감기에 걸려 끙끙 앓을 때는 민혁이 더 당황했다. 보통 친구가 아프다면 약 갖다줄까, 죽 시켜줄까, 물어봐줄 수 있겠지만 그런 별 거 아닌 것들조차 할 수 없는 귀신이라 아무말도 못하고 입만 달싹이고 있는 게 보였다. 역시, 쟤는 귀신이 뭐 저러지. 안절부절 못하고. 열이 올라 어지러운 와중에도 걔의 꾹 다문 입술만큼은 너무 잘 보여서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걸 보고 오해했는지 민혁이 형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리로 오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민혁이 머무는 자리가 차갑구 시원해서 내버려둔 채로 눈을 감는다. 밤새 민혁은 형원의 몸과 겹쳐 누워 선명한 심장소리를 들었다. 침대는 싱글사이즈였지만 좁지 않았다.
*
민혁은 형원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세입자들이 이 집을 스쳐지나갔지만, 죄다 영 기가 약해서 재미가 없었다. 물건의 위치만 조금 바꿔놔도 도망가버리고, 아무리 옆에서 쿡쿡 찔러봐도 미동도 었었다. 그런데 채형원은 처음봤을 때부터 뭔가 다르단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얘 미약하지만 영력 있네. 그러면 살면서 귀신이나 요괴는 몇 번 본 적 있을 법도 한데, 형원은 민혁이 처음이라고 했다. 말도 안 돼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같이 지내다보니 그냥 애가 둔한 거였다. 물건을 숨겨놓고, 전등을 깜박이게 만들어도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다가 코막힌 말투로 맹하게 한다는 소리가, 뭐지 미녀가 이거 너가 한 거야? 정도였다. 거기에 이민혁이 아닝, 답하면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그래놓고 어떨 때는 엄청 예민했다. 그러니까 까탈스럽다는 말이 아니라, 기민하다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자꾸 깊은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를 살핀다. 하루는 좋은 말씀 전하러 왔다며 물 한 잔만 베풀어주실 수 있겠냐는 사이비가 문을 두드렸다. 초인종이 눌릴 때마다 머리만 현관을 통과해서 형워나 누가 왔어, 외치는 게 민혁의 소소한 루틴이었는데 이번엔 형원이 민혁을 막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민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형원은 그냥 낌새가 별로니까 나가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나 안 보일텐데. 혹시나 보이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사이비한테 잘못 걸려서 위험해지면 어떡해. 그 말에 민혁은 얌전히 순응했다. 저 맑은 얼굴에 뒤로 혼자 무슨 심각한 생각을 그렇게 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근데 너 몇 살이냐.”
“죽을 때 나이? 아니면 지금?”
“둘 다.”
“스무살에 죽었어. 삼 년 전에.”
“...”
“왜. 갑자기 내가 불쌍해?”
민혁은 형원이 뭔가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허튼 생각 하지 마라, 대충 말하고 채형원 밥 먹는 거나 마저 지켜봤다. 형원은 조금 뜸을 들이더니 그냐, 하고 국물에 숟가락을 휘저었다. 형원이 갑자기 이런 걸 묻는 이유는 오늘 아침에 또 페이스북에 이민혁을 검색했다가 결국 발견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바로 이 이민혁의 계정을. 게시물은 많지 않았고 몇 개월 주기로 뚝뚝 끊겨 있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남겨진 사진들. 환하게 웃는 이민혁, 혼자가 아닌 이민혁, 교복을 입고 꽃다발을 든 이민혁. 멈춘 타임라인 위에 [이민혁님의 생일을 축하해주세요!] 게시물만 두어개 남아있었다. 귀신은 본래 사람이었다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막상 어디선가 사람 이민혁이 살아있던 흔적을 발견하니 기분이 오묘했다. 살아있었다면 나와 동갑이었을 텐데. 뭔가 믿기 어려웠고. 죽는다는 건 뭘까 싶고.
“어쩌다가... 죽었는데?”
“잘 기억 안 나는데, 사고였어.”
운이 나빴지. 민혁이 어깨를 으쓱 털었다. 그래서 이승에 미련이 남아 귀신이 된 건지도 몰라. 겨우 스무살이었는데. 대학교 와서 하고 싶은 거 진짜 많았었는데 눈 떠보니까 죽어있었어. 내 장례식 어떻게 치뤘는지도 몰라. 정신 잃은 뒤로 며칠이 지났는지도 몰랐단 말야. 그땐 여기서 자취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라 근처에 병원이나 장례식장 어디로 가야 있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그냥 내 자취방 다시 돌아온 거야. 여기 전에 내가 살던 곳. 나도 요 앞에 학교 다녔어.
말을 마친 민혁이 시선을 들어 형원을 살폈다. 밥 먹는데 갑자기 너무 무거운 얘기를 꺼내버렸나, 그런 후회를 조금 하고 있는데 연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채형원은 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늠해본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한 얼굴로,
“무섭진 않아?'”
“뭐가?”
“귀신 된 거.”
“……”
죽음이 무서운 건 그 이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은 그렇다. 무지를 무서워하고, 예측불가함을 무서워하고. 형원은 민혁 덕분에 죽음이 조금 덜 무서워졌다고 생각했다. 죽는 건 귀신이 되는 거구나. 이렇게 무해한 귀신이라면 죽는 게 별로 안 무서울지도. 근데 그러면 이민혁은? 귀신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건데? 환생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천국이나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걸 홀로 기다리고 있을 이민혁은 어떨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외롭게 끝을 맞이하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
“도와줄까? 성불하는 거.”
“너가 무슨 수로.”
“그냥 너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보자.”
“왜?”
“… 마지막에 옆에 있어주고 싶어서.”
*
[이민혁 성불 프로젝트]
아 이건 너무 정없어.
[이민혁 한풀기 프로젝트]
이건 너무 귀신같잖아!!
귀신 맞잖아.
그래도 싫어.
[이승탈출 프로젝트]
이제 만족?
엉. 깔끔하네.
노트를 펼쳐두고 형원과 민혁이 머리를 맞댔다. 펜을 잡은 형원이 종이에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꾹꾹 눌러 적는다. 그런 형원을 민혁은 조금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지켜봤다. 애가 좀 순하다. 많이 착하고. 너는 사람인데. 어떻게 귀신에게 마지막을 약속할 수가 있는 거지. 나는 귀신인데. 내가 무슨 소원을 말할 줄 알고 대뜸 귀신한테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 이민혁은 절대 그러지 않겠지만, 채형원은 다른 귀신 잘못 만났었다간 몸도 영혼도 다 털렸을 게 분명했다.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하고 싶은 거?
민혁은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하고 싶었던 게 뭐더라. 분명 스무살이 되던 날에는 꿈이 많았다. 딱히 거창한 건 아니지만 이제 성인이고, 현역으로 대학도 붙었으니 나를 가로막을 게 없다는 단순한 감상이었던 것 같다. 술도 마셔보고, 해외로 여행도 가고 싶고, 캠퍼스를 누비다가 평범하게 졸업해서 취직하고 살겠지. 그래도 어른이 되었을 때 내 모습이 궁금하고 기대가 됐다. 그 당시 민혁은 거침없이 뛰어들고 성취하는 청춘을 아끼지 않았었는데. 이제와서 공부하고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싶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런 건 더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니까.
민혁은 오랜만에 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에는 불신. 내가 죽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엔 의심. 왜냐면 나는 아직 이민혁이니까. 이민혁이 이렇게 여기 있는데 내가 어떻게 죽었다는 거지. 벽을 통과하지 않고 부딪혀보려고 몇 번이고 달려들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소리질렀다. 그 과정은 결국 내가 귀신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다. 이후로 무력함. 줄곧 모래 씹는 표정으로 시간만 죽이게 되는 시기였다. 홀로 남겨진 방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로 처분을 기다리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원해야만 했다.
채형원이 나타나기 전까진.
사실 이민혁은 죽은 이후로 요즘이 제일 재미있다.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건 거짓말이다.
이민혁 (李玟赫)
출생 : 1993-11-03
사망 : 2012-09-08
소원 : ??
성불 : X
*
민혁은 대체로 뻔뻔한 구석이 있었지만, [이승탈출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로 정도가 더 심해졌다.
“헉 형워나 저것 좀 봐. 저거 진짜 맛있겠다. 피자 먹고 싶어!!”
“귀신도 피자를 먹을 수 있어?”
“못 먹징.”
“...?”
“너가 대신 먹어줘야지. 대리만족으로 나 성불할 수도 있잖아.”
대충 이런 식이었다.
채형원이 밥 먹는 걸 지켜보면서 그 다음엔 김치 먹어줘! 아냐 초고추장 말고 쌈장을 찍어 먹어야지, 했다. 형원은 팔자에도 없는 먹방 비제이가 된듯한 기분이었지만 며칠동안은 그냥 잠자코 시키는대로 해주다가 한 번 제대로 체했다. 민혁은 내심 미안했는지 손을 주물러주는 시늉도 내준 다음 가끔씩 체할 일 없는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는 얘기나 했다.
이거 천만 넘었대. 영화 보러 가자.
진격거 전시회 한다는데 가구 싶어.
이따 밥먹고 카페갔다가 산책가자.
이건 성불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냥 데이트 아닌가? 대학가의 온갖 맛집과 명소를 줄줄 꿰게 됐다. 스무살의 소원이라는 건 원래 소소하고 활기찼던 것 같기도 하고. 형원은 자신의 스무살은 어땠는가 되돌아본다. 일주일에 여덟번씩 술 마시며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바라본 기억만 선명한듯... 그러고보니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체력이 좋았지? 그 사이 앞서간 민혁이 형원을 향해 손짓하며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형원은 스물과 스물셋의 격차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이내 그만두고 민혁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인근 동네를 전부 돌아다닌 다음은 여행이었다. 바다 가고 싶어! 고래 보구 싶어서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도 따놨는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채형원은 다이빙은 커녕 수영도 할 줄 몰랐다. 고래 보자고 형원을 익사시킬 수는 없는 법이니 강릉 해변을 보러 다녀오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형원은 정말 이런 걸로 성불이 되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빠르게 KTX 2인석을 예매한다. 왜 2인석이나 예매해? 그냥 너두 빈자리에 앉아서 가라구. 그러면 민혁은 실실 웃으면서 돈 아깝다고 타박했다.
민혁에게 KTX 좌석이 1인석인지 2인석인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귀신의 세상에서 공간은 제약이 될 수 없었으니까. 사실 여행지가 강릉 해변인지 집 앞 내천인지도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어디든 그걸로 성불할 수 없다는 건 민혁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민혁은 형원보다 한참 전부터 성불에 대해 생각했다. 지루한 하루하루가 기한 없이 계속되고, 빽빽한 세상 속에서 홀로 공허하다는 건 아주 버려진 기분이니까. 잘은 몰라도 민혁이 여태껏 남아있는 이유는 소원이 없었으니 처분도 없었던 게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이런 날들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아득히 비참해지니까. 언젠가 소원을 이루게 된다면 끝이 올 거라고 믿는 거였다.
그런데 형원아
아직은 끝이 올 때가 아니야
우리 마음이 통해서 네가 나와 같은 걸 바라더라도
내 진짜 소원은 안 말해줄 거야
이민혁 (李玟赫)
출생 : 1993-11-03
사망 : 2012-09-08
소원 : 채형원 ??
성불 : X
*
형원은 요새 하루종일 민혁에 대해 생각했다. 자꾸만 페이스북에서 봤던 사람 냄새 나는 사진들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 사진 속에서 같이 웃던 친구들은 나이 먹고 있을텐데 혼자서 여기에 고여버린 이민혁. 살아있었다면 분명 나와 동갑일텐데 영원한 스무살이 되어버린 바람에 덧없이 천진하고 해맑은 이민혁이 자꾸 명치를 묵직하게 만들어서 자꾸만 짠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못해본 거 다 해보고 행복하길 바라게 되는 바람에 전부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시키고, 관심도 없던 전시회 티켓을 사고, 열차에 몸을 싣는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형원은 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툭 꺼냈다.
“너 살아있었다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같은 학교니까 스치기는 했겠지.”
“……”
“운 좋게 대화 나눴을 수도 있구.”
그렇게 만났어도 너랑은 친해졌을 것 같은데.
순간 창밖이 까맣게 어두워진다. 터널 벽면만 이어지고 더 볼 것도 없는데 형원은 시선을 돌리지도 못했다. 이건 민혁의 속에서만 맴돌던 진심이 툭 떨어진 거라는 걸 안다. 까만 유리창 비치는 형원의 모습 뒤로 텅 빈 좌석만 보였다. 그제야 형원은 울고 싶은 기분이라는 걸 깨닫는다.
도착한 해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형원의 블랙롱코트가 나풀거렸다. 삼삼오오 모여서 열심히 인생샷을 건지고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인영이 홀로 서있다. 정확히는 옆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거지만. 누가봐도 수상한 채형원이 수상하게 묻는다.
“어때?”
“뭐가?”
“바다 보니까 성불할 것 같아?”
“음... 잘 모르겠어.”
좀 지켜봐야 알 것 같기두.
감흥없이 답하는 이민혁의 목소리는 파도소리에 뒤섞여 웅웅 울렸다. 철썩이며 부서지는 물방울이 뿌옇게 튀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둘은 인적이 드문 곳까지 느리게 걸어가 모래사장 위에 털썩 앉았다. 앉은 자리부터 축축하고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닷가의 해는 금방 졌다. 멀리서 어린 애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웃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몇 시간이고 짠내나는 바람을 맞으니 온몸이 끈적했다.
“성불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도 모르지.”
“그거 안 해도 괜찮은 거면 그냥 계속 여기 있어.”
“어?”
“그냥 나랑 같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아?”
“어엇…?”
“나랑 있는 거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순간 이 다음 말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강렬히 스친다. 지금껏 민혁이 되도 않는 시답잖은 것들을 들이밀며 이게 내 소원일 수도 있지 않냐고 바락바락 우겼던 이유가 성불 하기 싫어서였는데. 성불만 아니었다면 나도 진작에 너와 하고 싶었던 이런저런 것들을 어떻게 저떻게 했을텐데. 그런데 여기서 너가 내 소원을 들어줘버리면……
“나는 너 좋ㅇ”
“잠깐잠깐잠깐잠깐잠깐만!!!!”
당황한 민혁은 황급히 형원의 말을 끊고 입을 막았다. 정확히는 막으려고 했다.
“나는 너 좋아하는데.”
불쌍한 짝사랑 귀신의 손이 형원의 입술을 그대로 통과하는 바람에 전혀 막히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영영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결국 달콤한 노래가사처럼 흘러나오고, 멀리서 밤바다를 가로지르는 폭죽이 경쾌하게 터진다. 불빛으로 일순간 확 밝아지는 시야에 채형원의 얼굴이 가득 찼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직선으로 얽힌다.
민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성불할 것이다. 전에는 막연하게 성불도 죽은 그 날처럼 아주아주 아플지 겁이 났었는데. 그런 건 지금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엔 오직 방금 고백을 하던 채형원만 둥둥 떠다녔다. 뛰지도 않는 심장이 쿵쿵 박동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혼란한데,
“민혁아 너 얼굴이 빨개.”
어?
나 왜 성불 안 하지?
“분명 내 소원은 채형원이랑…”
이민혁 (李玟赫)
출생 : 1993-11-03
사망 : 2012-09-08
소원 : 채형원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성불 : X
Fin.